예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찾아가는 여정 - 서용선, 김학제 작가 인터뷰
2017 45호 / 이주희(미술과담론 기자) , 이채(정리도움)

“우리는 예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다소 막연한 물음에 대하여 묻기 위해서 양평 서용선, 김학제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조차 그만 둔 작가들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예술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에서 시작하였다. 서용선은 평면을 바탕으로 입체 설치 등으로 확장하면서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이어가고 있으며, 김학제는 조각 작업을 바탕으로 인간에 대한 폭넓은 시선을 지니고 있다.
각각의 인터뷰는 근황을 묻는 것으로 시작됐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삶과 예술에 대한 지치지 않는 열정이었다. 어쩌면 서용선, 김학제 두 작가는 예술 그 자체에 대한 이해의 방법을 묻는 우문에 자신들이 이어온 시선과 시간을 들려주는 것으로 현답을 들러주었는지도 모른다.

“예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찾아가는 여정”에 대한 인터뷰를 먼저 서용선 작가(이하 ‘서’)부터 시작하겠다.

서용선 작가(이하 ‘서’)
김학제 작가(이하 ‘김’)
이주희 미술과담론 기자(이하 ‘이’)

이: 최근 선생님 근황으로 중국에서 찍은 사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곳은 어떤 일로 방문을 하셨는지요?

서: 우리가 한국 전통의 우수한 예술 작품들 중에 고구려 벽화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그 구체적인 내용을 어디서 읽을 수 없었던 것 같아요. 분명히 알고는 있는데. 그렇게나 훌륭한 벽화가 있고 실제로 보면 무엇인가 이렇게 오는데 그 내용은 잘 모르겠고. 무엇을 한 것인지, 무엇을 그린 것인지, 그것을 설명해 주는 글도 별로 없었고. 오랜 기간 한국은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면서도 사회적 신념이 다르다보니 드나드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볼 수가 없었어요. 사실 고구려 벽화가 한국미술의 중요한 전통중 하나인데도 우리가 거기 가서 본 일도 없고,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역사학계에서도 고구려에 대한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라고 하더군요.


서용선 작가


이: 그럼 고구려에 대한 관심에서 이번 중국행을 결정하신 건가요? 어떻게 고구려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나요?

서: 제가 대학을 졸업했을 즈음 인사동에서 일본사람들이 펴낸 통구(通口)라고 하는 책을 보았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지역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는 책이지요. 상하권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 같아요. 1930-40년대는 일본사람들이 중국에 먼저 들어가서 역사에 대한 왜곡을 시작했을 때니깐 한국인이 답사를 한 게 아니고 일본인이 답사를 해서 만든 책이에요. 어떤 사람을 통해서 그 책을 가질 수 있게 됐는데 그 책에 고구려 벽화 사진이 실려져 있었어요. 꼭 가지고 싶었던 그 책을 수십 년간 가지고 있었어요. 뭔가 의기가 있다. 어떤 때 그런 경우 있잖아요. 금방 이해되지는 않아도 마음속에 뭔가 남는... 그런데 잘 모르겠는 거. 그러다 이번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갈 수 있게 됐어요.

이: 오랜 관심이셨네요.

서: 지속적인 것은 아니고 띄엄띄엄 생각을 이어왔어요. 1980년대에 제가 처음 역사라는 것을 다루었는데 당시에는 그렇게 구체적이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지금 이야기 하는 것처럼 ‘미술의 근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이런 문제를 생각하며 내 주변에 ‘언제부터 미술이 한국에서 시작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던 거에요. ‘미술은 어디서부터를 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가’ 같은 문제를 항시 생각하게 되잖아요.

<심문>, 323 x 400cm, Acrylic on canvas, 2007

<심문1>, 노량진, 매월당, 180 x 230cm, Oil on canvas, 1987-1991


이: 그래서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되셨나요?

서: 그림 그리는 사람은 무언가 이론적인 진행을 지속하지 않는다고 해도 문득문득 오는 자기 불안감. 지금 이야기 하는 것처럼 나를 작가라고 부르고 나도 작가라고 생각하는데 그 뿌리에는 정말 내가 작가인가 하는 이런 의문점 같은. 그리고 또 내 그림이 무슨 의미는 있는가와 같은 것을 생각할 때 보면 이러한 역사가 하나의 근거가 되잖아요. 아무리 가깝게 추측을 해 보아도 천 년 전에 그러한 형태와 비례를 갖춘 그런 인물들을 그려낸 흔적이 저기 땅속에 묻혀있다는 거 자체가 그때 당시에 작가라는 말을 붙이건 안 붙이건 그런 행위를 한 사람이 있다는 확신을 들게 하잖아요. 그런 게 하나의 작품을 할 수 있는 믿음의 한 부분이죠.

이: 그러한 생각을 이후로도 지속하게 한 다른 경험들이 더 있으신지요.

서: 그러고 더 그러한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울산 반구대암각화(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국보 제285호)를 답사했을 때에요.

1) 지안 또는 집안 이라고 불리우며 중국 지린성 퉁화시의 현의 등급에 해당하는 시이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자강도 만포시와 마주보고 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처, 위키백과)

한반도에서는 그 자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1971년에 문명대 선생이 반구대 암각화 조사팀장을 맡고 나서부터일 거에요. 어떻게 인간이 반만년을 살아온 나라에 기록하나 없을 수가 있을까요. 그건 분명히 조형행위이잖아요. 그리고 굉장히 리얼한 느낌이 있어요. 가서 그곳이 지역 환경과 같이 보면 정말 사투를 벌이면서 고기를 잡아서 먹고 살려는 인간의 본능이 있어요. 또 그것을 기록하고 그것을 이미지로 만든 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떤 목적을 갖고 했겠지요. 이럴 때 그 뿌리의 근거를 갖게 되죠. 그래 여기에 수천만년 전 이전의 조형행위가 남아있고 이어져 내려왔지만 단지 우리가 정리를 잘 못한 것이구나... 같은. ‘내가 논리적으로 잘 알고 그림 그리는 행위를 해 온 것은 아니지만 행위를 하다보니까 그 근거에는 이런 게 분명히 있었구나’ 이러한 것을 느낄 때 자기 정체성 같은 것에 믿음이 생기는 거죠. 어느 정도는.

이: 독서를 하는 사람들도 그러한 느낌을 받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기원전부터 쓰여 있었던 책에서 보편적으로 추구되어왔던 가치와 그것에 대한 믿음이든 행위이든 이러한 기록을 볼 때 그렇다고 할까요. 또 그러한 것을 지금 이 시대에 기록해 놓는 것도 누군가의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어느 날 딱 주제가 주어져서 그림을 그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런 것조차도 찾아가는 방법 자체가 그림 그리기의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게 다 연결돼요. 이번에 답사를 다녀왔다가 기록해놓은 것들이 있는데 그게 현 시대의 사회적 변화와 밀접하면서도 그러한 경험을 통해 시야가 트이는 것도 가능해지는 것 같아요.

이: 이번 중국으로의 답사를 진행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으신지요.

서: 우선 가면 언어가 통하지 않잖아요. 또 그곳에 있는 조선족 중 1퍼센트의 인원도 고구려 성토를 답사한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이: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도요.

서: 네. 연변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조차도 중국의 정치상황으로 인해 역사의식을 제공받지 못해요.

이: 교육환경 자체에부터 그러한 문제가 있군요.

서: 네 단지 역사교육은 일본의 제국주의와 싸운 항일 이후의 것만 교육을 시켜요. 그게 중국 공산주의 체제가 중국을 단합시키는 방법이더라구요. 여러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현지에 계시는 분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번 방문에 만난 분 중에는 연변에서 우리 표현으로 하면 큐레이터의 역할을 하시는 분도 계셨어요. 이분은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그림을 그리던 분인데 영국 유학생 중에 중국의 공산당 간부를 만나 중국 현지의 조선족 문화축제의 감독을 맡았어요. 당시가 20대의 젊은 나이로 알고 있는데 총 디렉터를 맡은 것 같아요. 그 행사에 사오년 전에 작가로 참여한 일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분이 현지에서 연구소를 차렸어요. 조선족 문화만 연구하는 아주 뜻 깊은 일을 진행하고 계세요.

이: 그분께서도 현지에서 뜻이 맞는 분들을 만나셨던 거네요.

서: 그렇죠. 우연히 그렇게 연결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어요. 연변에서 조선족 문화를 연구를 많이 하긴 하지만 고구려 문화에 대해선 아무런 의식이 없었거든요. 제가 간다고 하니 본인들이 직업 운전을 해서 함께 고구려 성터를 가보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실제로 보고서는 너무나도 놀랐지요. 아마 그 이후로는 고구려 문화에 대한 연구도 함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연구소의 어떤 체제를 잘 만들어 둔 것 같아요. 자기는 한국 사람이지만 그곳의 조선족이나 중국인들과 협업하면서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이: 어떤 사명감 같은 게 있으셨을까요?

서: 그러니까 이 지점이 계속해서 이야기 한 내용과 연관이 돼요. 미술보다 더 중요한 미술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그러니깐 자기는 그림만 그렸는데 거기 가니깐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동포들에 대해 현대적 정비 체제가 갖추어지지 않은.. 그 뿌리가 있잖아요. 한국이 달라보이더라고요. 저도 가서 보니 우리 민족이 한반도로 흘러들어온 흔적, 뿌리가 느껴지기도 하고 대륙이 가지고 있는 이상과 우리 한국 사람들이 만주시대 때 그곳에서 뿌리내린 것과 항일 세력들과 농부들과 그리고 또 러시아와 연관된 조선족 문화까지..


<패왕촌산성, Paywangchon Mountain Fortree>, 215 x 315cm, Acrylic on linen, 2017


이: 그곳에서 작가, 그림을 그리는 분들도 만나셨나요?

서: 그러니까 그곳은 삼각지역이에요. 중국 북한 러시아가 한 곳에서 만나는 지역이에요. 그곳을 보면 한국을 보는 눈이 한국 본국과는 조금 달라요. 우선 그쪽 사람들은 이곳 남한에 대한 것을 잘 몰라요. 현대의 남한이 이렇게 아주 도시화되고, 미국화와 유럽화가 되어 있는 줄을요.

이: 거기에 계시는 중국 국적의 화가분들이요?

서: 중국 국적의 한국 사람들, 또 중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그곳의 사람들은 러시아를 통해서 문물을 공급받기 때문에 1930-40년대 리얼리즘의 이상은 없어요. 그걸 반복해서 다지고 있지요. 우리가 그 이후의 미술사조로 배워온 언어가 일단 통하지 않아요. 현대미술용어, 특히 영어로 된 용어가 그들에게는 통하지 않아요. 제가 학교에 있을 때도 그것을 느꼈어요. 중국 조선족이 90년대에 유학을 온 일이 있어요.

이: 대학원 학부생 정도의 학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서: 그렇죠. 어린 학생도 있고 본국에서 교수를 하시던 분이 한국에 와서 대학원 코스를 하기도 했지요. 내가 만난 한 작가는 연변대에서 교수를 하시던 분이에요. 그곳에서 미술 협회장도 하셨던. 조선족 1세대, 개방 1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분께 이야기를 들어보니 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몇몇의 작가들이 해외를 나갈 수 있었던 거에요. 마치 우리나라의 김환기, 김병기 이분들이 미술협회장을 하시다가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요. 첫 세대로 해외를 나가실 수 있었지요.

이: 중국에서 오신 분들은 이후 어떻게 지내셨나요?

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 분은 근 20년 사이에 굉장히 현대화 됐어요. 우리와 같거나 어쩌면 우리보다 빨리 현대화를 이루었어요. 본인도 한국과 파리와 뉴욕을 오고갔는데 자신의 2세 역시도 동행하면서 공부를 다 시켰어요. 그래서 그분의 딸은 지금 프랑스에 거주한다고 하더라구요.

이: 그분 역시도 시야가 많이 확장되셨네요.

서: 그리고 그 분도 이렇게 다니면서 본거에요. 북경도 보고 한국도 보고 프랑스도 보고. 이쪽저쪽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어느 정도라는 것은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이: 선생님의 말 중에 ‘본다’라는 것이 참 중요한 말인 것 같습니다. 본다는 게 어쩌면 그것을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말씀처럼 뭔가 느껴지는 것도 있고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오는 것도 있구요. 매우 중요한 일 같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분들이 더 다니고 더 보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구요.

<빨간눈 자화상>, 259 x194 cm, Acrylic on canvas, 2009


서: 그럼요. 그 분은 연변 미술을 어떻게 개조할지 고민하는 거 에요. 그곳에 예술협회장은 공무원이에요. 미술협회라는 게 우리나라처럼 사단법인이 아니라 공무원인 거죠. 근데 그 사람과 제가 만난 자리에서 느낀 게 공무원들은 새로운 걸 만들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거에요. 그곳은 항상 정치국에서 관여를 하니깐 저와 인터뷰를 해보려는 자리에서도 사드 문제 같은 것으로 단절시켜 버리더라구요. 그곳의 예술협회장도 중국인이니깐 그런 경우를 함부로 거스르지 못하는 게 있어요. 그러다보니 저와의 대화도 어느 정도만 이야기 하자 그렇게 된 것이지요.

이: 나누셨던 대화 중에 그 수위라고 하면 어느 정도였을까요? 심각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서: 한국기준으로는 일반사람들의 이야기 정도인데 그곳에선 심각한 거 에요. 그런 대화를 했다는 것 자체가 적발되면 심각할 수 있지요. 그냥 넘어갈 수도 있고 그곳도 그런 경우가 있지만 누군가 비난하고자 한다면 적발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 그곳의 작가들은 흔히 말하는 표현의 자유보다도 생존하기 위한 검열을 하셔야 하는 거네요.

서: 그럼요. 표현의 자유는 많지 않아요. 특히 사회문제를 다루거나 정치문제를 다루거나 그런 그림은 더욱 쉽지 않지요. 북경 같은 곳에는 조금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지방으로 갈수록 지역사회관계와 자기검열 때문에 점점 표현의 자유가 좁아지는 것이지요.

이: 선생님 그럼 잠깐 화제를 바꾸어 보겠습니다. 조금 전 학교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선생님께서 재직하실 때의 이야기를 여쭈어볼 수 있을까요. 입시라던지 교육환경 등을 보아오시면서 여러 생각을 하셨을 것 같은데요.

서: 네 그렇지요. 대학입시라는 것이 대학교육과 굉장히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는 거에요. 왜냐하면 어떤 사람을 뽑느냐는 것은 그 대학의 이념을 리드하는 통로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사회에서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면 대학 교수들이 교수로서의 사회의식이 없어서 부정의해요. 본인이 몸담고 있는 다른 사회의 압력 때문에 전문가로서의 자기 주관을 피력하지 않아요. 제가 있던 대학에서도요 일년 내내 가만히 있다가 입시 가까이 와서 같이 모여 ‘이번에 뭐 문제를 어떻게 한다.’더라 정도 하고 말아요. 그렇게 시험을 보고 나면은 분석을 해야 하는데 분석을 할 수 없게 제도가 되어있어요. 그 시험의 결과물을 본부에서 다 가져가 봉인해버리거든요.

이: 그렇게 되면 결과만 남는다는 말씀이신가요.

서: 네. 점수만 남는 거죠. 그 점수가 어떻게 나왔는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들어내지 않으려고 해요.

이: 그것은 실기고사를 행하고 있는 지금도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서: 지금도 다르지 않아요. 그것이 사회에 공적으로 논의가 되어야 비로소 미술이 대중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입시문제에 학부모들이 정말 예민하잖아요. 이게 공공에 이슈가 되고 대중화된다면 아마도 학부모들이 많은 의견을 제기할거에요. 교수들은 전문가들이니깐 그걸 겪어내야 하는데....

이: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고 있자면 미술 입시는 으레 전문가집단의 판단이니깐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넘어간다던가... 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서: 네 그게 벽 뒤에 숨어서 얼굴을 보이지 않는 거에요.

이: 그게 신뢰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전문가 집단에 대한 믿음도 아닌 것 같구요.

서: 교육과정에서도 연필 한 자루라도 가지고 자신의 것을 끌어내도록 한다면 그것은 사람마다 다른 결과를 가질 수 있겠지요. 그래서 그 기준을 가지는 것은 힘들겠지만 그런 식으로 입시의 논점을 제시해놓고 전문가들이 논쟁을 해야 하는 거 에요. 입시라는 것은 절대로 합의를 할 수 밖에 없어요. 절대적인 이공학이 아니니까요. 제가 보는 예술의 가장 큰 장점은 타협이에요. 이미지라는 어떤 취미에 대한 활동이고 정답과 기준이 완전히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대다수가 어떤 것이 좋다고 하면 그쪽을 선택할 수도 있는 거에요. 그런 논쟁이 새로운 미적 기준을 세울 수 있게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다 피하고 있는 거에요. 입시철에 언론과 언론인들이 이곳은 어떻게 되었다. 저곳은 어떻게 되었다. 이런 의견들이 나와야 해요. 그래야 학부모들도 분별력을 갖지요. 내 아이들은 어떤 교육을 어떻게 시켜야겠다 이런 고민을 할 수 있게 해야지요. 학부모들에게도 문제점은 있어요. 대학에 입학시키는 것만이 목표이지 가서 뭘 하는지는 잘 모르거든요.

<청계천에서>, 230 x 520 cm, Acrylic on canvas, 1989


이: 선생님 혹시 최근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유영국 선생님의 <절대와 자유> 전을 보셨는지요?

서: 네. 덕수궁에서도 보고 부산시립미술관에서도 보았습니다.

이: 네. 저는 전시 인터뷰 영상에서 서용선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유영국 선생님께서 “믿음을 가지고 발라가시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저에게는 어려운 말이지만 미술이던 붓질이라는 행위이던 그런 것에 대해 믿음이라는 말을 뱉을 수 있는 작가가 누가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 그림을 그리는 다른 분들 역시 충분히 어떤 생각을 가질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 유난히 유영국 선생님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 믿음이라는 것은 일본의 근대적 작가상인 것도 같아요. 작가라는 것이 무엇을 하는 것인가. 내용보다도 그 형식에 대해서요. 유영국 선생님은 한 개성 있는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또 직업으로 살아간다는 것에서 예술가의 형태를 보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분들에게는 그게 신념 같은 것일지도 몰라요. 한 번 형식이라는 것을 선택하면 그게 그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에 되지요.

이: 어떤 정신에 대한 이야기인 것도 같네요.

서: 제가 생전 유영국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들었어요. 선생님은 거의 말이 없으신 분인데 그저 한 두 마디를 하셨던 것 같아요. 그때 선생님에 제게 “인물 한다는 거지요?”라고 물으셨어요. 그렇게 질문한다는 것 자체가, 그 질문에 대한 함축적인 의미가 “거기에다 인생을 건다는 거지?” 이런 식으로 느낌이 오더라구요. 그게 사람에 따라 예술에 어떤 느낌을 혹은 예술가라는 전형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것인데 그분은 자기가 무언가 형식을 정했으면 끝을 보고 가는 게 삶이다 이렇게 보는 것 같더라구요.


<23 St. 출구>, 125 x 200 cm, Acylic on canvas, 2010

<U-Bahn Alexander Platz 2>, 290 x 207 cm, Acrylic on canvas, 2015


이: 선생님은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하셨나요?

서: 그런 걸 하는 게 저는 좋다고 생각한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대답 한 것 같아요. 유영국 선생님도 그 말 자체가 아무튼 굉장한 결정이다. 이렇게 대답을 해주신 것 같구요.

이: 선생님께서는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또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지금까지 가지고 계시는 어떤 미술적인 믿음이 있으신지요? 나라는 작가는 지금까지 이런 생각을 가져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뭐 이런.

서: 좀 포괄적인 말이지만, 직접적인 인간에 대한 발언이다.

이: 미술이라는 것이요.

서: 네 저에게는.

이: 그게 이런저런 많은 인간들을 다루어 오신 거잖아요? 이런 인간 저런 인간...

서: 그런 주제도 물론 포함되는 것이죠. 또 그림을 그린다는 모든 행위에서 직접적인 인간에 대한 체취가 묻어나는 것 같아요. 체취가 미술이 본질이다. 전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형상으로건 아니면 그리는 태도이건 또 회화라는 형식이건. 형식이라는 것도 사실은 거의 노동이거든요. 신체적 노동이지요. 저같은 경우는 어려서부터도 그렇지만. 그것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머리를 쓰는 것과 몸으로 움직이는 쪽 양쪽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스포츠 하듯이 그림을 그리는 거죠. 몸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그렇게 뭔가 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 굉장히 저에게는 중요한 부분 같아요. 미술을 한다는 것에서.

이: 그럼 앞으로의 선생님의 화업에서, 조금 폭넓은 의미로 ‘이것에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다.’이던지 아니면 ‘내가 이걸 좀 더 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그런 부분이 있으신지요.

서: 네 그 뭐랄까요. 그 뭔가 물질적으로 표현을 한다는 것이 그 직접성 때문에 미술이 영향을 좀 받거든요. 그림은 그림대로 조각은 조각대로 제가 하는 여러 가지 다이지요. 그런 것을 조금은 덜 받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작업을 하다 보면은 저런 나무 조각들이 내 전공분야도 아니고 저는 그것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거든요. 사실은 삼차원이라는 것을 한 게 얼마 안 되었어요. 굉장히 어렵게 했어요. 그전에는 그게 안 되니까 판재를 오려서 색을 칠하고 그렇게 했지요. 어떻게 보면 그건 회화적인 습관이에요. 또 제가 직접 입체를 해보고 싶어서 손을 대기 시작한 건 대학 졸업이후에요. 그 이후로 학교에서도 배우지 않았지만 혼자서 터득해보려고 한 게 거의 30년 걸린 것 같아요. 집중을 하지 않았으니 그랬던 것이겠지요. 그림을 그렸고 저것을 과외로 하니깐 그랬겠지요.

이: 그러한 관심을 어떻게 이어가셨나요.

서: 그 대신 계속 끊임없이 꿈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것을 해보겠다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삼차원을 해보니깐 잘 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계속할 수는 있겠다”이런 믿음이 생겨요. 그게 ‘될까 안 될까’를 가지고, 그 고민에 대해 무슨 대단한 원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해왔거든요. 입시생들의 데생하고 똑같은 문제더라구요. 작가가 혼자서 터득하면 되는 거에요. 인간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약했던 거지. 뭔가 자꾸 배우려고 하고. 무슨 빠른 길이 있는 것처럼 생각을 했던 거 에요. 근데 그게 저걸 하면서... 지금도 저것이 좋은 작품은 아니지요. 거칠고 세련되지 못했어요. 하지만 나는 개인의 그런 자유를 즐기는 게 예술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모든 가치관에 구속받지 않고 나를 위해서 실험해보는 거 에요. 내 몸이 그것이 되는가 안 되는가. 물론 조각을 하시는 작가에게 가서 조금 더 전문적으로 자문 받고 그러면 빨리 될 것 같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요. 혼자 터득하고 싶었어요. 지금도 그렇구요.

이: 재료를 고를 수 있는 안목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은데요.

서: 네 그럼요. 모든 물질의 성격이라는 것이 있지요. 특히 저는 저런 제 조각 작업이 입체적 조형으로써 우수하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저런 조각 작업을 만드는 목적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특히 한국이라는 입장에서 그리고 한국을 넘어서 세계 통틀어 보편적 믿음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나무라는 것이 인간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물질이에요. 같은 물질 중 에서도요. 게다가 아까 이야기한 대로 직접 자연에 대한 체험을 해보기에 아주 좋은 재료에요. 예술형삭으로서 목조각과 입체 목공이 목재를 가지고 뭔가 만드는 것. 이것보다 더 오래 전통적으로 유지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지금 우리는 그런 게 너무 약하죠. 저는 지금도 목판화를 정말 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그 기술을 누구에게 배우려고 하는 빠른 길을 택하지 않는 것이 제 단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집중하면 어떤 성취를 보일 수 있을 텐데요.

이: 타 장르와의 비교에서 자꾸 남들이 무엇을 많이 하고 좋은 성과를 내면 자신도 그쪽으로 가기도 하고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작가들의 의지라기보다는 쫒아가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드는데요.

서: 그렇지만 이해도 가는 게. 주변에 그렇게 해서 잘되는 사람들도 많이 보면, 또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옆에서 겪는 게 많아지면... 우리가 그런 걸 보는 게 쉽지가 않아요. 너무 성공과 실패를 가르려고 하고. 어떤 면에서는 성공도 실패도 없는 건데. 나중에 가면 정말 시간이 지난 뒤에 보면 예술이라는 게 삶이라는 것과 분리할 필요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이: 그게 어떤 의미에서 하시는 이야기일까요.

서: 이 정도로도 어떤 점에서는 사실 늙고 몸 아파지고... 거의 죽음이라는 게 저절로 터득을 하게 되거든요. 왜냐면 몸이 변하니까요. 그게 느낌이 오지요. 당연히 인간이라는 게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아 이런 게 인생이 이렇게 변하는구나. 이것은 어디선가 한 번 글에서 썼던 것 같은데 지금도 그 생각은 같아요. 그냥 살아가는 한 방법인데... 이게 그 삶에 대한 정확한 답이 없어요. 사실은. 그렇지만 누구나 다 어느 위치에서 자신을 돌아볼 즈음에 또 앞을 나아갈 길을 보면서 오는 정도에 문제에요. 성공과 실패는 반드시 성공이 있고 실패가 있어요. 양면을 가지고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피카소를 원하지요. 뭐 여러 가지의 성공과 그런 연장에서...


<뉴욕 지하철역>, 200 x 250 cm, Acrylic on canvas, 1997-1998


이: 또 한 번 다른 이야기를 여쭈어 보겠습니다. 여러 작품들에 대한 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이곳 작업실만 해도 겨울을 나으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서: 작품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관 관리가 정말 힘들어요. 영국 출신인 제 지인이 그런 말을 했어요. “한국에서는 유화를 해서는 안 돼”라고. 이곳은 너무 계절의 변화가 뚜렷해 이곳에서는 유화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더라구요. 그렇지만 요즘은 또 복원기술이 발달해서...

이: 제게는 그게 보이는 색에 대한 이야기라고 들리면서도 빛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들렸습니다. 작품의 빛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시가 되는 지역의 빛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고요.

서: 생각보다 그게 차이가 클 수 있지요. 제가 백남준 선생과도 인터뷰를 했을 때 그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러시아와 북유럽, 그런 곳과 한국과 비교하면 띠가 있대요. 빛의 비슷한 띠가. 어떤 샤머니즘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아요. 러시아를 가로질러가는 숲과, 한반도로 연결되어 나오는 식물에 투과되는 햇빛과, 그런 식물의 색들에 원색을 많이 쓴대요. 투명한 원색들.

이: 회화에서 색은 중요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 혹시 색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서: 우리말 중에. 때때옷이라는 말이 색이 다르게 보이는 것 때문에 나온 말 같기도 해요. 색이 다르다는 건 빛이 물질에 반사되고 보이는 이러한 효과들이 집합되어 있는 거니까요. 거기에 쌓이는 빛에 따라 그 정도에 따라 어떤 것은 투명하기도 하고 불투명하기도 하고 그런 것 같아요. 저의 그림에서는 그렇게 큰 차이를 느끼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단색화 같은 경우에는 느낄 수 있지요. 그러나 일반인들에게는 어려울 수 있어요. 그렇지만 단색화는 원색이 아니라 밝은 색조, 흰색조가 많기 때문에 조금은 더 뚜렷하게 느껴질 수 있어요. 그것에 집중된 것에 그 그림의 특징이니까요.

이: 색에 대한 차이가 언어적인 차이에서 오는 어떤 문제도 있는 것 같습니다.

서: 우리는 언어의 정도와 그 감정으로 색을 공감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푸르스름하다던가 이런 표현들이 있지요. 하지만 영어에는 딱 그것에 맞게 지정된 용어들이 있지요. 그렇지만 그것도 정확한 건 아니에요. 어느 물감 회사나 그 표준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제 경험엔 영국이나 중국 같은 곳은 붉은색이 굉장히 잘 발달되어 있는 걸 느껴요. 또 일본의 물감은 큰 면적에 사용해보면 확실히 우리와는 다른 걸 느끼구요. 우리가 제대로 된 표준 물감의 적지만 물감들을 사용해보면 어떤 물감은 단단한데 어떤 것은 굉장히 얇다고도 느끼게 되죠.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색별로 본다면 프랑스의 프렌치 블루는 확실히 다른 것과는 다르게 밝고 따듯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독일이나 영국의 푸른색은 그런 푸른색은 아니지요.


<부란덴부르그 문, Brandenburg Gate>, 400 x 500 cm, Acrylic on linen, 2006


이: 그런 색의 차이에 대한 예를 혹시 우리나라 작가로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서: 한국에서 보면 김환기 선생님은 남쪽 해안가의 푸른색, 다도해 지역의 푸른색이라는 느낌을 받아요. 그런가하면 이북 출신의 작가들이 그린 바다를 보면 짙은 푸른색으로 확연히 다르죠. 남쪽이 확실히 바다의 깊이나 그에 따른 빛의 반사가 다르잖아요. 그거 때문에 반사되는 색감이 다르죠. 그 부분은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 같아요. 김환기 선생님과 전혁림 선생님은 비슷한 것도 같아요. 한분은 동쪽 한분은 서쪽의 지역적 배경을 가지고 계시지만 두 분 다 남쪽이시고 전혁림 선생님의 푸른색도 아주 짙은 푸른색이 아니라 밝고, 중간에 흰색이 섞인 밝은 푸른색을 쓰시거든요.

이: 작가분들도 본인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색을 옮겨놓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서: 눈이 그렇게 개발되어 있는 것이겠지요. 나의 기억에 가장 좋고 인상 깊었던 것이나 그게 아니면 어떤 특정한 의미가 있는 것을 찾는 것 같아요. 하나의 예로 해외에서 작업을 할 때 어느 정도 작업을 해서 보면 이정도면 거의 된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런데 한국으로 가져오면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아요. 그림은 본다는 것은 사실 환경과의 대비를 보는 것이기도 하거든요. 미술관에 가져다 놓으면 미술관의 벽면과 함께 보는 것이고 이런 작업실에 가져다 놓으면 내가 드나드는 공간의 분위기와 함께 보는 것이지요. 항상 어느 관계 속에서 보는 것이죠. 그림이라는 것이.

이: 그런 경험 중에 생각나는 게 있으신가요.

서: 예를 들어 원색을 사용해도 미국에서 그리면 어느 정도 만에 완성이 된 것 같아요. 그런데 한국은 모든 공간이 작은데다 반사가 빠르고 복잡하고 변화도 많죠. 그러니깐 여기서는 더 밀도가 있지 않으면 그림이 끝난 것 같지가 않아요. 그런데 미국은 넓고 건물도 크고 모든 조건들이 다르니깐 다른 느낌이 들더라구요. 우리나라는 한국과 일본의 중간정도 되는 것 같아요. 일본은 다듬어진 작은 공간들이 많이 있지요. 그러니깐 밀도에서 오는 텐션같은 게 있는 거 에요. 자기그림의 완성도를 항상 자신이 사는 환경과 그 텐션과 비교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디선가는 괜찮은데 어딘가에서는 더 그려야 하고 더 다듬어야 하고 그렇죠. 그러니깐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 그러한 배려가 되어 있는 공간을 찾아야지요.


이것으로 서용선 작가 인터뷰를 마치고 김학제 작가(이하 ‘김’)의 근황을 묻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이: 최근의 근황에 대해 질문 드립니다.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김: 작가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여태까지 해왔던 모든 작업들에 대해 자기성찰을 해오던 중이었습니다. 과연 내가 가지고 있는 미술적, 예술적 탤런트가 과연 의미는 있는 것인지, 독자적이기는 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곤 합니다. 이 같은 질문이 작가로서 유념해야할 근본적인 화두이지만 요즘에 들어 특히, 예술의 가치와 그 효용성의 대상을 생각해보면 제 자신을 위한 유희적 반사신경 같은 것에 의존하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아니라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인간들과의 소통, 조금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만인을 위한 소통을 넘어선 거대담론 같은 것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인가 같은 질문에 대해 고민의 시간을 가지곤 했습니다.

김학제 작가.
홍익대학교 및 대학원에서 조각 전공. 1990년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 수상, 1991-2010년까지 동아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역임. 현재 인간과 자연, 미래를 주제로 작품에 전념하고 있슴. 11회의 개인전과 부산비엔날레, 〈East bridge-plastic garden〉전 (베이징798아트팩토리, 서울토탈미술관), 〈THE ROBOT〉전 (아트파크), 〈Eroticism21c〉전 (아트선재센터), 〈디지털미디어와 현대조각의 만남〉전 (상암IT타워), 〈한일조각교류전〉 등 전시 참여.


이: 그래서 얻으신 결론이 있으신가요?

김: 결론은 없지만 최소한 누구나 가능하다고 여기는, 특이점 없이 고만고만한 경험치를 작품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근본적인 생각을 다시 한 번 다짐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도 제 관심사인 거대한 우주와 자연세계 안에 새로운 것은 없다는 절망 사이에 놓여있는 개념으로서 무엇인가 표현 가능한 것을 찾으려고 고민하는 정도가 되겠지요. 현재는 상상에서 가상으로, 조금 더 감각적으로 진화된 시대이니까 여기에 걸맞은 어법은 무엇인지 그 표현의 다양성을 무한으로 개방하고자 하는 마인드 컨트롤도 하면서 최근엔 회화작업과 부조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선생님의 초기 작업은 조각이 주된 장르였습니다. 이후에 어떤 계기로 타 장르로의 확장을 이루셨는지요?

김: 현대미술의 흐름에서 서구의 여러 작가들이 장르를 섭렵하는 것을 보고 순진하게 욕심을 낸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각기 유별한 장점이 있고 더 나아가 전방위적인 설치작업같이 장르끼리 적합하게 조합될 때 오케스트라처럼 상승효과를 내는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기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동원해 더욱 섬세한 조형어법을 구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기존의 장르에서 어떤 답답함 같은 걸 느끼셨나요?

김: 장인으로서 훈련된 기술이 이제는 조금 답답한 면이 있지 않은가요? 특화된 한 기술의 다양성측면에서의 한계를 극복해보고자 등장한 게 서구예술의 오브제이고 이는 또 물신과의 이종교배로 20세기에 획기적인 지평을 열었지요. 이러한 건 수 천년 미학의 역사에서 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미학자 아도르노는 재료, 그러니깐 물질을 조직하는 방식과 과정에 내재된 객관성에만 몰입해 과거의 형식 언어를 고집하는 예술가는 퇴행적일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 반동적이라고까지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 선생님의 작품 역시 그러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데요. 그러한 유연함을 지닌다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러한 유연함을 가지게 된 계기나 과정이 있으신지요?

김: 제가 미술을 시작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유년기의 만화나 낙서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시절 당시 세계적으로 흥행하던 비틀즈의 멤버 4명을 물감으로 그린 게 모방의 심화단계로 들어간 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선 요즘처럼 미술대학을 가기위한 입시생의 개념이 전혀 없었고, 다양한 예술에 빠진 신봉자가 되었어요. 미술부에서는 그림과 조소를 했고, 문학 동아리에서는 매주 시를 발표하고 품평을 받던 문학도였지요. 고2때는 락밴드를 결성해 악기와 노래에 빠지기도 했지요. 돌이켜보면 정말 가지가지 하던 문제 학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서 록밴드 생활을 하며 신춘문예에 시를 투고해서 두 번 떨어져도 보고 바쁘게 살았지요. 그것이 군대 제대 후 미술대학에 들어서며 잠잠해 졌다고 할 수 있겠네요. 아무튼 그런 시절의 다양한 경험이 지금이 이 시대에 유용한 거름이 되는 것 같습니다. 표현의 다양성에 조금 자신이 생긴 것이지요.

이: 지금도 다양한 장르의 활동을 하고 계시지요?

김: 미술작업에 매진하기 위해 교단을 떠나기 전까진 강의시간과 작업시간 이외에도 정말 다양하게 대중과 가까운 곳에서 부딪히며 살았습니다. 대중영화의 아트디렉터, 카메오연기, 22년 전 부산국제영화제 창립과 함께 무대에서 계속 해온 거장들과의 핸드프린팅작업, 부산의 지인들과 각출하여 재즈클럽을 열어 라이브활성화를 통해 재즈뮤지션 양성도 하고 가끔 연주도 하며 지낸 그런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소비적일 수 있는 타 작업을 배제하고 오로지 제 미술작품에 사용할 스케치와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사진이나 영상이미지같은 경우 저작권문제가 있으니까 외국 나갈 때 마다 꼭 기록해오는 건 기본이고요. 옛 기억을 더듬어 제 작품으로서의 작사, 작곡도 틈틈이 하고 있어 앞으로 서서히 그 총체적인 결실이 작품으로 맺어질 것입니다.


<Future Lyricism 2007-1>, 165 × 87 cm, Digital print, f.r.p 조각, 섬유커튼, 2007


<Future Lyricism 2007-2>, 176 × 123 cm, Digital print, f.r.p 조각, 설치, 2007


이: 선생님의 작업에서 ‘미래서정’이라는 키워드는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김: 2003년도가 제 작업에 있어서는 분수령이 되는 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그러다보니 고독한 존재로서의 인간, 성과 인간 등 몇 개의 인간과 관련된 소재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다가 2003년도 뉴욕에 연구교수로 갈 기회가 생겼고 미국 서부의 무지막지한 자연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지요. 한 예로 우리가 알고 있는 그랜드캐년이 한 눈에 아득히 보이는데, 그랜드 캐년의 주름이 쫙 펼쳐지면 서울 부산 간 길이에 이르고 내려다보는 평균 깊이가 1.6km정도라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엄청난 자연경광을 보면서 내가 콘크리트 숲속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온 게 초라해져 보이더라구요.

이: 자연으로부터 어떠한 충격을 받으신거네요.

김: 그러고 나서부터 거대한 시각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이때부터 자연과 인간, 시간과 인간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하게 되었지요. 과거의 그 어떤 시대보다도 예측 가능한 미래를 살고 있는 현대인으로서 특히, 현재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정신없이 전개되는 스릴 있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고민 중에 ‘미래서정’, 문자 그대로 아직 오지 않은 서정적 심상을 미리 표현해보고자 하는 주제어를 2004년 귀국전의 제목으로 생각했습니다.

<Future Lyricism-생명의 중량>, 420 × 150 × 180 cm, Mixed media, 오브제, Led light, 2014


이: ‘미래서정’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키워드로 ‘자연’, ‘인간’ 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과의 대화에서도 비슷한 키워드를 많이 들을 수 있었구요. 반대로 ‘인간이 아닌 생물’의 키워드도 찾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 작품의 내용이 이러한 요소들의 연관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것 같기도 한데요. 이렇게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기까지 선생님이 가지고 계셨던 어떤 발상의 전환에 대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김: 저에게는 서구의 인간이 자연을 지배해가는 이분법적 구조보다는 동양의 자연과 인간 일원론이 훨씬 가깝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자연관을 어떻게 미학적으로 해석해내느냐 하는 표현어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디지털 혁명으로 새로운 창세기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드는 시대입니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우주로 공간개념이 확장되었고 외계의 것에도 관심을 두는 시대이지요. 제 작업에도 우주와 지구, 인간과 ET, 동식물 등을 등장시켜 여러 패러다임들이 엉켜있는 이 시대를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표현적으로는 다소 미래의 것으로도 보일 수 있지만 이 지점, 이 시점에서 가질 수 있는 인간 개인, 인류, 자연에 대한 번민을 다루게 되었지요.

<Future Lyricism-길잃은 미래>, 400 × 200 × 210 cm 설치, Mixed media, 오브제, 2014

<Future Lyricism-천상천하유아독존>, 120 × 120 × 200 cm, f.r.p 조각, 오브제, 2014


이: 그러한 주제들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든 가능한 게 현대미술의 영역이지 않나”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이 시대에도 장식과 위안의 기능을 하는 작품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예술에 있어 표현에 대한 기술은 어느 정도 다 도출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의 모든 기술과 어법이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 새로운 조합으로 최전선의 예술을 리드해 간다고나 할까요. 이러한 최전선에서 이루어지는 구태의연한 사기행각(?)이 하나의 유행을 이끄는 힘이 되었고 창의적 발견 정도로 권위가 떨어진 것 같기도 하구요. 아무튼 제 개인적으로 최근의 왕성한 현대미술작가군을 보면서 그들이 구사하는 엉뚱한 조합의 사례를 분석해보는 것은 공부의 한 방법이 되는 것 같아요. 아날로그방식으로 디지털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미래에 관련된 소스들을 여러 매체로부터 수집하는 사고의 넝마주이는 계속 유지될 예정입니다.

<Future Lyricism-신천지창조>, 122 × 245 cm, 아크릴&우레탄 페인팅, 오브제, 2014


이: 그러한 사고의 진행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제시하고 선보일 수 있는지도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김: 실천적인 과제인 것이지요. 그 다음은 거창하게 이야기 한다면 예술사회적인 이름 아래 저의 작품이, 발상이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하나의 자존심을 형성할 수 있는 경영의 차원으로 넘어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게 노력만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시대적인 배경과 어떤 운 같은 것도 함께 작용하는 것 같아요. 어느 작가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막연하고 고독한 전투를 이어나가야지요.

이: 그 막연하고 고독한 전투를 이어나가기 위해 유지하고 계시는 선생님만의 어떤 방법 같은 게 있으신가요?

김: 요즘 저의 주 관심사는 적재적소에 매칭되어야 할 다양한 소재들의 새로운 사용법과 이를 위한 유연한 사고의 확장입니다. 이런 게 어느 단계에 다다르면 공부만으로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아무튼 이를 위해서 크게 두 가지 실천의 균형을 갖으려고 노력합니다. 그중 하나는 예술의 최신정보 외에도 정신없이 진화하는 과학의 정보를 검색해 시대상을 읽어내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색의 소스를 챙기는 일입니다. 또 하나는 유연한 사고의 확장을 위한 정신적 트레이닝이에요. 예를 들면 꽃잎하나 돌멩이 하나도 그들의 오랜 시간의 역사를 유추하고 대화하듯이 사색해서 보는 연습, 또 명상을 통해 욕심 버리는 연습 등... 일종의 자기최면훈련도 하고 있습니다. 때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연기 해보기, 거짓말 해보기 같은 위험한 장난까지도요.

이: 그러한 사색의 시간이 ‘미래서정’으로 종합된 것이군요. 이러한 작업의 컨셉이 당분간은 이어지는 건가요?

김: ‘미래서정’이라는 말에는 제 작업의 주제가 은유되어 있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사유함으로써 현재를 진보적으로 성찰해보고자 하는 일종의 사고의 트릭이기도 한데요. 의심과 우려와 비판이 공존하는 현재와 미리 당겨온 미래와의 사이 그 지점을 보이기 위해 이러한 컨셉이 당분간은 유지될 것 같습니다.


<Future Lyricism-진동지구>, 10 m설치, Mixed media, 오브제, 2016


이: 조금 화제를 바꾸어 보겠습니다. 작가이시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온 선생이기도 하셨는데요. 교육자와 작가의 시간을 겸하면서 느끼셨던 점이 있으시다면 어떤 게 있으신지요.

김: 구태의연한 옛날의 것은 학생 스스로 다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미술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는데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재료에 대한 기술적인 부분을 강조했었고 여러 매체를 학습해야한다고 강조했었습니다. 그 부분은 저 스스로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작가로서 느끼셨던 어떤 갈증 같은 건 없으셨나요?

김: 개인의 작품을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건 항상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작업에 있어서도 일관성 있는 리듬이 끊어지는 게 큰 단점이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 학생들을 지도하시면서 조금 더 중점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이 있으신가요?

김: 학생들에게 늘 “네 자신을 알라”고 이야기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생각의 과정이 작품의 토대가 되는 것이죠. 늘 자아비판을 하면서 내가 예전의 양식을 예쁘게 가지를 쳐서 재조립 하는 게 과연 현재에 맞는 방법인지 그게 아니라면 무엇인가 새로운 예술을 위한 그 무엇을 할 것이지 고민해보는 거죠. 마구잡이로 모방하는 표현 이전에 개인의 심성을 파악하고 예술에 대한 태도를 조심스럽게 결정지어주어야 원만히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면서 오래 작업할 수 있는 작가가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선택의 기로에서 다양한 문을 관찰할 수 있도록 국내외 현대미술계의 수많은 작가와 작품을 보여주었던 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그러한 시간을 보내시다가도 다시금 전업 작가로 돌아온 계기가 있다면 어떤 이유에서 인지요?

김: 제가 미국에 머물 때 그곳의 교육현장을 보니 훌륭한 아티스트는 초빙교수의 역할로 부분적인 활용이 되고 있더라구요. 그 외에 대부분의 교수는 정말 교육자로서 교수의 직업에 충실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엔 교육자인 교수가 작가를 겸하고, 금전적인 욕심을 내서 상업 작가처럼 활동하는 교수도 있고 그런데 그곳은 그렇지가 않더라구요. 보편적인 사고와 예술의 다양성을 가르쳐야할 교수로서의 덕목과 작가로서 가지고 있는 예술가적인 고민의 지점 사이에서 당연히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한 고민 고민 속에 과감히 사표를 내고 나왔습니다.

<욕망과 우주사이>, 10 m설치, Mixed media, HD video, sound 1분23초, 2016


이: 긴 고민의 시간 끝에 큰 결정을 내리셨네요. 그렇게 다시금 찾게 된 작가로서의 삶을 지속해 나가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떤 요소나 태도 같은 게 있으신가요?

김: 그런 것들을 주욱 나열하자면 자기애로 똘똘 뭉친 작품에 대한 신뢰와 열정, 경제적인 지구력 등이 있겠네요. 이런 요소들이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참 어려운 일입니다. 현대미술에서 예술가적 토대라는 것이 그렇게 도덕적이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인류에 대한 사명감 같은 건 더더욱 어려운 소양일 것 이구요.

이: 그렇지만 선생님은 인간을 주제로 작업을 하고 계시잖아요? 또한 인간은 어떠한 생각을 지속해 나갈 것 이구요. 그것이 예술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인류에 대한, 인간에 대한 어떤 관심의 연장에 있던지 간에요.

김: 네. 설령 그것이 한 개인의 개똥철학일지라도 인공지능이 도래하는 이시대의 고민과 함께 인간을 해석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결과물이 우연과 필연의 어느 지점에서 재수 좋게 발견되어 (환영받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면 그건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많은 작가분들이 그러한 시간을 맞이하기 위해 곳곳에서 노력중이신 것 같습니다.

김: 그래도 노력하는 자세는 그 목표에 가장 가까운 실천방법이니까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지요.

이: 다들 현실과 이상 사이의 여러 지점에서 치열하게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요즘의 현실에 대해서 한마디 해주시지요.

김: 국내 현실을 보면 예술관련 학과는 과잉인데 반해 프로 작가로의 길은 굉장히 좁은 문입니다. 수많은 작가들이 자신을 뽐내기에 치중하기 보다는 생활예술인의 태도를 갖고 이웃들과 풍요로운 예술의 세계를 나누는 그런 풍토가 되었으면 하고요. 예술이니 문화를 운운하며 겉만을 핥는 수많은 담론들도 지양되어야겠지요. 급속하게 미래를 맞이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예술을 어디에선가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Future Lyricism 2014 v1>, Single channel video. 4분29초. sound,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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