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Arizona에서

윤재갑(독립큐레이터)

모더니즘 이후 인간은 모든 지식이나 대상들에 대해서 초월적인 존재임을 자처해왔다. 인간이 자연과 신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독립된 주체로서 각인시키고, 스스로를 신으로 옹립한 것이다. 미술사에 천재의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소박한 기능공의 신분에 만족하던 예술가도 이제는 ‘구상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물의 형상을 자유자재로 재창조할 수 있는 신의 지위로까지 올라선 것이다.

그래서 근대 문명에서는 자연과 초자연적인 요소가 배제되고, 오히려 ‘자연과 대비되며,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제도와 지식의 결과물’로만 문화의 정의를 한정지웠다. 인간만이 이 세계의 주인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주체, 이성, 합리성으로 무장한 인간 중심의 물질문명이 가져온 결과들은 전지구적 생태 위기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라는 참혹하고 반인간적인 폭력이었다. 우리가 지나온 지난 세기는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에 내제된 모순들에 대한 힘겨운 투쟁이자 성찰에 다름 아니다. 20세 후반의 대표적인 사유 구조인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은 이러한 모순들에 대한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이었다. 피폐한 인간 군상으로 표현되어온 김학제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 대한 질문과 반성에서 출발한다.

김학제의 작업 속에는 인간과 인간 이외의 것을 대비시키고 타자를 대상화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대한 회의와 반성들이 지속적으로 녹아있다. 그의 지난 작업은 ‘주체의 자기 소외’, ‘자아와 사회의 상호 배리’ 그리고 ‘문명의 억압과 육체적 파편화에서 비롯되는 뒤틀린 성적 욕망’ 등의 세 가지 유형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어떤 작업에서는 그것이 여성을 대상화하고 지배하려는 마초적 남성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존재의 무게, 1999> 같은 작업에서는 처절하고 자폐적인 설치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형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이 시기의 작품들은, 홍대앞 씨어터 제로 건물 난간에 위태하게 걸터앉은 조각처럼, 주제의식이 너무 직설적으로 형태화 된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근작에서도 어느 정도 지속되는 이러한 특징들, 즉 형상성과 주제의식의 직! 접적 형태화는 ‘Post Human’ 적 상황을 묵시론적으로 전달하기에는 적합하지만, 작가와 독자 모두의 상상력을 형태 속에 가둬버린 것도 사실이다.

20세기 인간 생태학의 post human적 묵시록은 매튜 바니의 절개된 인체로 그려지거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연에 대한 한없는 향수로 나타나거나, 도나 헤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문’처럼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완벽한 거부로 나타났다. 그러나 김학제의 최근작에는 혐오나 향수, 부정을 넘어선 중성적이고 환상적이며, 경이롭고 두려운 세계에 대한 느낌들이 스며있다. 무엇이 계기로 작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 내부를 집요하게 파헤치던 작가의 시선이 다른 어떤 곳으로 향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가 본 것은 아마도 상처와 욕망이 치유될 수 있고 인간과 타자가 공존할 수 있는, 부드럽고 아련한 미지의 그 무엇일 것이다. 그곳은 매트릭스의 자궁처럼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가 없고, 사회학적 인간과 생물학적 인간의 경계가 모호하고, 인간과 사이보그가 교차되고, 가상과 실제가 혼재하는 전혀 새로운 공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그의 새 작업 ‘이방인-Arizona에서’를 주목하고 있다. 이 작품은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새로운 현실들, 인간을 포함한 자연과 가상세계 혹은 우주적 공간에 대한 경이로운 환상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나는 이 작업이 형상성과 주제의식의 직접적 형태화라는 초기 작업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작가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리라 예감한다. 주제나 형식 모두에서 새로운 작업의 윤곽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다음 전시가 사뭇 기대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