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인간의 조건

글-최낙영/미학

오후 11시 55분, 이것은 지구의 일생을 하루에 빗대어 볼 때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시각이다. 오후 11시 정각에 등장하여 40분 뒤에 사라져버린 공룡이 차지했던 시간의 팔분의 일만큼도 차지하지 못하는 인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의 자정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더욱이 자연과 인간을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보는 세계관이 진보와 발전에 방해되는 가치들을 쳐내는 도구가 된 이래로, 시계바늘의 움직임은 한층 더 분주해졌다. 그리하여 결국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게 되면, 지난 24시간 동안 이루어졌던 지구의 생은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제자리에서 탈선한 채 파편으로 떠돌 것인가 아니면 암흑, 무無가 되는 것인가. 그리고 사라진 지구 위에 서있던 인간은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작가 김학제는 그 자정 이후, 즉 미래에 대해 사색하고자 한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우주 생명체, 사이보그, 우주선 등의 소재를 사용하거나, 미래를 연상케 하는 단어를 작품 제목으로 직접 제시하는 근간의 작품 활동을 통해 충분히 드러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미래를 제시하는 예언자적 미술가라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의 작품은 우리가 어린 시절 그려보던 상상화와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사색을 의미화하기 위해 시선의 방향을 전복시킨다.
그는 현재의 시점에서 막연히 상상하지 않는다. <미래서정/ 2007>이라는 작품 제목이 암시하듯, 그가 하고자 하는 바는 미래에 흐르는 정서, 세분화하여 말하자면 미래적 시각에 비춰진 인류에 대한 감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 담긴 시선은 미래에서 시작하며,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연속적으로 훑는다. 마치 미래의 누군가에게 인류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시선의 전복은 조각가 출신인 김학제를 디지털 프린트 작업으로 이끌었다. 그는 대형 디지털 프린트 작업을 위해, 직접 찍은 몇 천장의 사진 중 필요한 이미지를 추려낸 뒤 이를 합성한다. 일반적으로 합성 기술은 미적 효과의 증대를 위해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김학제의 경우에 이는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그의 결과물은 지나칠 정도로 색이 선명하고 형상은 또렷하다. <미래서정>에서 그가 취한 소재 모두는 -동서양의 자연 풍광, 낙타, 검은 소, 꽃과 나체의 이미지 등- 평면을 가득 채운다. 그렇기에 디지털 사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세련됨을 여기서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는 뒤늦게 디지털 사진에 입문한 그의 경력 때문도 아니고, 그가 가진 미의 기준이 남다르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그가 추구하는 것이미화된 인류의 이미지가 아닌 까닭이다.
그가 한 화면에 담고자 하는 것은 지구라는 혼재된 공간이며 인간사의 압축된 시간이다. 그리하여 동서양의 풍경은 공존하고(<미래서정1>), 각기 다른 곳에 위치한 사막은(<미래서정2>)연속되면, 인간의 다양한 종교와 사상, 인간의 생과 사에 대한 은유는 한 화면 속에 배치된다. 그런데 이 모든 은유와 암시 중에서 작가가 ‘인류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정보’로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이에 대한 대답으로 ‘에로스’를 채택한 듯하다. 그리고 이를<미래서정>의 디지털 프린트 작업을 통해, 실제 전시 공간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는 미래적 존재이자 관객인 외계인(<미래서정1>)과 사이보그(<미래서정2>)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플라톤의 ‘향연’이래 철학사에 각인된 이 개념은 그 역사성만으로도 타임캡슐에 소장될 가치를 지닌다고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역사성은 에로스가 인류를 이해하려는 시도에 있어 본질적인 것임을 반증한다. 에로스는‘향연’에서 육체에 갇힌 인간을 이데아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힘이다. 또한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이것은 존재하는 생명체 자신이 잃어버린 통일성을 유지하고 구성하려는 힘이다.
결국 에로스는 자신이 현재 지니지 못한 것, 곧 결핍을 충족시키려는 힘이며, 이는 욕망과 연결된다. 욕망을 갖게 됨으로써 생물학적 욕구와는 다른 차원에 진입한 인간은 자신만의 역사를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완전한 만족에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의 원칙에 따라 에로스는 결핍 위에서만 존재한다. 이러한 모순과 긴장은 필연적으로 이를 회피하고 비유기적 상태를 지향하는 죽음 충동, 즉 타나토스를 수반한다. 그러나 타나토스가 무조건적으로 죽음,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타나토스는 어머니와의 분리, 상징계로의 진입이라는 연속된 상실과 결여의 과정을 겪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충동이며, 에로스와 함께 삶을 움직이는 추동력이 된다.

<미래서정>에 드러난 의미화는 곧 이러한 삶과 죽음, 곧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변증법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역사이다. 결핍의 숙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종교와 사상, 타인과의 유대를 역사 속에 기입해왔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결핍과 소외를 불러일으켰다. 이모든 과정과 반복은 <미래서정>을 통해 평온하면서도 무기력하고, 환희에 젖어 있으면서도 고통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다. 창세기적 암시와 묵시록적 분위기의 공존, 꽃의 만개와 시듦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역동을 그대로 암시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김학제는 한 화면 안에 인간의 역사와 이를 이끌어온 추동력을 담고, 이를 미래적 시선에게 제시한다. 그리하여<미래서정>은 오후 11시55분부터 자정까지, 지구와 인간의 일생 최후 5분을 담은 가장 압축적인 안내도가 된다.

- Eroticism 21c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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