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um:나는 나의 몸이다.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글:노연수/미학

사유적 미래: 아무도 속할 수 없으나 누군가에게는 존재할 그 어떤 시공간에 대하여

미래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잠이 들 때나 일어나서나 우리는 하루를 계획한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상 속에 좌절하며 냉정하게 다음 일을 예측하거나 스스로를 위로하며 더 나은 앞날을 꿈꾼다. 김학제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미래는 그와 같은 개인의 단순한 미래가 아니다. 하지만 예언적인 어떤 것 또한 아니다. 그는 순수 조각 작품, 키네틱 아트, 사진작업 그리고 디지털 사진작업과 조각을 함께 설치하는 디오라마 형식의 작업 등 여러 가지 형식으로 미래에 대해 접근한다. 그는 인류의 진화 모습을 상상하면서 조각과 사진 매체를 이용하여 신체와 자연, 인공물을 한 프레임에 담아 그의 사유적 미래관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일련의 그이 사진작품들은 우주선, 로봇, 공룡 드으이 이미지와 생명력이 느껴지는 인간의 누드를 직접적으로 배치하여 대립되는 구도와 함께 어색한 모습의 미래 사회를 표현하고 있다. 세련되게 표현하는 것을 버림으로 그는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리하여 미래임에도 원시적으로 우리의-사회적 공동체가 아닌 단순한 개개인의 군집으로-고찰과 사유 끝에 만들 수 있는 시공간으로 존재하게 된다. 대표적 작품으로 을 통해 이와 같은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의 배경은 우리나라의 억새가 자라고 있는 가을 혹은 초겨울 강 하류이다. 작품의 2/3 이상을 차지한 구름 있는 하늘에서는 그 구름들 너머로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여기까지의 풍경은 수많은 풍경화와 흡사하며 상업적인 시와 같이 작위적이며 진부하여 지루하게까지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공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배치하여 거북함을 만들어 낸다. 그 요소는 바로 전면에 놓인 나체의 엎드린 여성의 엉덩이와 허공에서 나르고 있는 UFO와 우주비행선이다. 작품 속 여체의 곡선은 멀리 보이는 산의 능선을 닮았지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기는커녕 작품을 보는데 장애물 같다. 우주선들은 언젠가 우리가 실현할 것이 아닌, 이미 개발되었고 하늘을 날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다소 조잡한 합성사진쯤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기술적인 부족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착각을 자아내지 않으려는 그의 솔직한 의도로 보아야 한다.
그의 작품을 깊게 이해하기 위하여 들뢰즈를 언급하자면,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는 근대의 재현적 인식론에 대해 비판을 하며 근대성을 “시뮬라크르(Simulacre)의 잠재성”을 통해 정의하고 있다. 시뮬라크르의 잠재성은 중심이나 진짜보다도 주변, 가짜가 지나고 있는 가치를 조명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이다. 그러나 시뮬라크르의 의의는 원본과 복사본을 구별해 내는 이분법적 논리에 있다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분리에서 해방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탈근대의 특성을 기반으로 그는 가타리와 함께 몸에 대한 연구를 한다. 그들은 신체와 기관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유기체적 신체에 반발하여 어떤 기관에 의해서 작용되고 결합될 것인지 미리 결정되지 않은 신체로 ‘기관 없는 신체’라고 부른다. 들뢰즈와 카타리의 ‘기관없는 신체’는 존재 자체로 탈중심과 해체주의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대변한다. 김학제의 신체는 이와 같은 성격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앞서도 말했듯이 그것이 만들어진 이미지임을 숨기지 않는다. 또한 전통적으로 그림의 주체가 되어왔던 신체는 작품 속에서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다. 에는 고정된 동질성이 있지 않다. 작품을 볼 때 느끼게 되는 불편함은 그 곳에서 기인한다.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의 신체이기에 우리가 안정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신체는 노골적이지만 현실감이 없다. 자연이 그대로 투영된 신체이다. 결국 인공물과 인간, 자연이 공존하면서도 이질적인 대상으로 겪게 될 발전과 변화에 대한 지각보다는 신체의 배치를 통하여 인간이 종래에는 어디를 향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것은 동시에 필연적으로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탐구와 깊게 연관된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누구든 쉽게 알 것 같지만 끝내 알 수 없는 근원적 질문에 대한 결과물이다.

그의 작품이 모두에게 답이 될 수는 없지만 정답이 없기에 부정되지 않고, 앞으로도 현실이 될 수 없지만 미래 자체가 불확실한 것이기에 얼마든지 표현될 수 있다. 그곳은 인간과 사이보그가 교차되고, 가상과 실제가 혼재하는 전혀 새로운 공간이며 생각 속에 존재하지만 육체가 배체될 수 없는 판타지이다. 이미 일상 속에 노출되어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해 처절하게 대면한 후에 다시금 근원적 에너지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그러한 판타지이다. 후퇴는 후퇴이나 비약적으로 전진한 후에 돌아갔을 때만 존재하는 후퇴인 것이다. 회귀하려는 미래라니, 참으로 알쏭달쏭하다. 그의 이중적 코드는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발견되며 표현되고 있다. 그것들을 풀어나가다 보면 드는 생각은 진정 미래적이다. 비록 그것이 선악이 분리되지 않았던 때로 돌아가기 위해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되돌려야 하는, 머나먼 길의 절대 불가능한 미래로 보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