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제: 시간유희 그리고 시각논리

시간의 본질은 흐름이다. 어제는 오늘을 마련하고 오늘은 내일을 재촉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이렇게 진행하는 흐름으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미술개념에 역사개념이 첨가됐다. 과거와 현재로 이어달리는 시간이 미술사(Art History)에 정착되었다고 말한다. 지식을 다루는 미술사에서 작품과 작가의 이름이 기록되어 미적 평가기준이 마련되었고 그리하여 좋음과 나쁨이라는 판단도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에서 현재를 찾아야하고 현재의 평가기준은 과거의 미술사에서 고찰하라고 작가와 평론가에게 떠넘겼다. 미적 판단은 이렇듯 시간과 장소에 예속되기 마련이다. 오늘의 평가기준이 어제에서 고찰되고 현재의 판단은 과거의 평가기준에 근원을 둔다.
김학제 작가의 시간유희. 작가의 작품세계는 현대미술에서 말하는 평론가의 역할을 넘어선 시간의 유희에 집중한다. 그리하여 동시대미술에서 요구하는 평론의 기준도 넘어섰다. 현대조각을 대변하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르네상스 회화사에 자리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19세기말 프랑스에서 미국에 선물되어진 자유의 여신상. 김학제의 작품은 이렇듯 미술사와 친분을 맺으면서 즐거움을 만끽한다. 그렇다고 작가의 노정이 미학적 재현은 아니고 철학적 모방론도 아니다. 미술사적 해석을 이미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차용이라는 비평적 개념을 초월한 시간적 즐거움에서 맞닥뜨린다. 작가의 시간적 유희. 미래에서 오늘을 봐야 한다는 시각적 논리이자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간여행이다. 시간의 단층들이 조립되고 재구성된 세계이자 꼼꼼한 분석을 요구하는 그러면서도 낯설고 친숙함이 공존하는 다차원적 공간이다.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비교예문이 있는지 없는지 그 여부에 따르는 현재의 비평적 과제. 이러한 고답적인 비평에서 벗어나 한계 상황으로 몰아가는 시간의 유희가 가시화 되었다.
작가의 시각논리. 김학제는 이번 갤러리 쿤스트독KunstDoc에서 볼 수 없는 시간을 조각으로 그리고 사진으로 가시화 했다.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달리는 인식된 시간이 시리즈작품으로 역행했다. 미래에서 날아온 창작의 소리들이 앉아있는 남성상과 조화로 변신되었다. 미래에서 여행하던 꿈속의 환상들이 사진속의 로봇 사이보그로 현재로 날아왔다. 자유의 여신상이 입체작품으로 현재화 되었다. 이렇듯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이어가는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를 그리고 미래에서 과거를 관찰하라는 강령이자 미래의 서정이다. 시간의 본질이 흐른다는 진리가 시각미술에서 타당한지를 의문시하는 그리고 그 시점의 선택은 자유에 있다는 작가의 미래서정이다. 미래, 현재, 과거, 어디에서 정착하고 어떠한 시간개념과 대면할지 선택의 몫은 자유이다. 미래에서 과거로 여행할지. 회화사에서 조각사로 이어갈지. 창작의 논리에서 미술사로 들어갈지. 우리가 선택하는 자유의지는 이렇듯 창작의 논리에서 그리고 창작의 자유는 시간의 유희에서 출발하고 배회한다. 가볍지도 그렇다고 순간적으로 포착되지 않은 진지한 작가의 노정에서 갤러리 쿤스트독의 전시가 어떠한 의미를 부여할지 과제가 불거졌다. 그리고 작가의 시각적 논리가 동시대미술에서 어떠한 위치로 자리매김할지 논쟁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조각과 사진미술은 시간이 동행하고 그리고 시간을 유희하는 입체와 평면들로서 관찰하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소중한 선물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시간의 유희가 시각의 논리에서 그리고 시각의 논리가 시간의 유희에서 재구성되는 순환의 고리에서 관람자의 호기심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김학제 작가의 미적 논리에 천착되는 순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뒤샹이 제시한 오브제의 경지와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오히려 김학제 작가의 시각적 논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난상토론 <(주제: 2011 도 다른 나로서의 자아)>과 함께 진행하는 김학제의 기획전시에 관람객의 발걸음과 관조자의 반응에 거는 기대는 적지 않을 것이다.

글:김승호(철학박사)